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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4장 사랑의 실천

by 신수토기종삼 2024. 10. 17.
 
사랑의 기술
‘사랑’은 기술인가 독일 태생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인류의 영원한 화두인 사랑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프롬이 던진 이 질문은 《사랑의 기술》이 출간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사랑의 기술》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1956년 첫 출간 이후 34개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과,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우리 시대의 대표적 스테디셀러이자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문예출판사에서는 이번에 새로운 표지로 바꾼 《사랑의 기술》 개정판을 출간했다.
저자
에리히 프롬
출판
문예출판사
출판일
2019.09.01

오늘은 사랑의 기술 4장에 대해서 설명해 보도록 할게요.


4장 사랑의 실천

이제부터는 사랑의 기술을 이론적 측면이 아닌 실용 문제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사랑의 실용적인 활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몸소 사랑을 경험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알아본 사랑의 기술의 이론적 측면을 혼자서 실천해 보고 검토하는 등 숙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하루에 여덟 시간씩 매일 같이 규격화된 일을 하며 지낸다.

8시간이 지나면 긴장을 풀고 싶어 하고 자기 훈련에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하지만 기술을 실용을 위한 훈련은 전 생애를 통해서 훈련하여야 한다.

 

  •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4가지 방법
    • 정신집중
    • 인내
    • 혼자 있기
    • 최고의 관심


어떤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선 정신의 집중하여야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혼란한 생활 방식으로 현대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라디오를 듣고 이야기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먹고 마신다.

이러한 점은 사람들이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혼자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결과가 빠르게 나타나길 바라면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위에 설명한 정신 집중과 혼자 있기는 어렵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산업 조직은 신속성을 중요시한다.

현대 사회의 모든 기계는 얇고 느린 기계보다 더  빠르고 생산량도 많다.

여러 경제적 이유로 현대사회에서는 시간을 줄여 주고 생산량이 많은 기계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기계가 인간에게 좋다"라고 생각한다. 기계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런 생활에 적응하다 보니 신속하지 않은 일들을 보면 "시간을 잃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은 얻었을 때 어느  곳에 시간을 사용해야 될지 잘 모른다.

네 번째로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최고의 관심이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그 기술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기술들에 대해 배워야 한다.

이렇게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면을 훈련하고 정신 집중하고 인내하고 실행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가 우리 할아버지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불필요한 사치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훈련은 권위주의적이고 절약 저축을 강조하였으며

생활에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무시하고 하루 8시간 규격화된 생활 방식과

반대되는 것들을 하여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 음악 감상 산책, 영상, 독서 등 초보적 규칙으로써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훈련은 부과된 규칙대로 실행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표현되어야 한다. 훈련을 즐겁게 생각하고 훈련이 고통스러운 게 꼭 좋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정신 집중은 매우 하기 힘들다. 현대인들에게 정신 집중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사랑의 능력이다. 정신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 있어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조바심을 느끼고 불안하기까지 하다.

혼자 있는 시간에 자신의 마음을 비우기보다 뭔가 상념에 시달려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온 각종 상념, 생각을 제거하고 자신의 호흡을 따라가

내 힘의 중심과 만나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 20분,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정신 집중을 연습해야 한다.

이런 연습에도 음악 감상, 독서, 경치, 구경 등 전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순간하고 있는 활동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 일이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는 이런 몰입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 정신 집중을 배우려면 쓸데없는 대화를 피해야 한다.

직업상 공통 경험이나 함께 먹은 빵에 대해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이미 경험했고 이 일을 추상적으로 다르지 않으면 적절한 대화 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 문제나 종교문제 대해 이야기 할 때 그 이야기가 보잘것없는 경우가 있다.

표현이 진부하거나 이야기하는 대상의 마음을 쓰지 않으면 그 대화는 보잘것없이 진다.

나쁜 친구라는 게 파괴적이고 악의 있는 사람만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고 생활 궤도가 불쾌하고 우울한 친구를 피해야 한다.

사상과 대화가 보잘것없는 사람들, 육신은 살아 있으나 정신이 죽은 자들을 생각하지 않고

상투적인 의견을 주장하는 자들 그 이야기는 피하면 좋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을 피하기는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그들과 대화 중 상투적이고 보잘것없는 방식으로 반응하기보다 인간적인 반응을 보여준다면

이런 사람들도 충격을 받아 행동을 바꾸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에 경청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 관여하려 한다.

이런 식에 대화는 서로를 피곤해하게 한다.

정신을 집중하고 어떤 이야기를 듣는다면 더 피곤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반대이다.

정신의 집중하지 않으면 오히려 피곤하고 정신을 집중하면 우리를 각성시킨다.

정신에 집중한다는 건 지금 현재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신집중은 거의 모든 대상과 대화 중에 실행해야 한다.

관습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서로 친밀 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처음에는 정신 집중 훈련이 힘들다.

하지만 모든 것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억지로 할 필요가 있다.

어린아이처럼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계속 시도해서 어느 순간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민감할 필요가 있다.

운전에 집중한 사람이 차에 상태나 도로 표면에 변화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타당한 변화의 개방되어 있고 긴장을 푼 경계 상태여야 한다. 우리가 조바심이 난다거나 화가 나거나

백일몽의 잠기거나 도피적 행동을 할 때도 우리는 알아차리고 있어야 한다.

이 일들을 합리화하는 방법이 많더라도 합리화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기울여야 한다.

내면의 소리가 우리가 왜 우울하고 조바심을 내는 거를 알려 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 상태에 매우 민감하다. 하지만 정신적 상태에 대한 민감성은 매우 없다.

그래서 그들의 어버이나 친척들과 그가 태어난 사회집단의 정신적 기능을 기준으로 생각하여

그 기준과 같다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일을 관찰하려는데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육을 할 때 이렇게 성숙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선생은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태도도 전달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영화배우 연예인 등 여러 사람들이 경쟁이 모델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신적 능력을 제외하고 모든 면에 갖추고 있다.

그들이 이런 자격을 갖추게 된 거는 메이킹의 성공했다는 거를 알려 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인물이 인간의 경지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예술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적 기능을 어떻게 비전화해야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면 아직 자본주의에도 기회가 남아 있다.

그 기회는 인간에 어떤 특성을 전수하는데 바탕을 두고 있다. 이제부터는 사랑의 능력 중 중요한 성질을 알아보도록 하자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아 도치를 극복해야 한다.

자아 도치는 자신의 내면의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한다.

자아 도치를 극복하게 되면 사물의 있는 그대로 보는 객관적인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런 객관적 능력은 자신의 욕망과 홍보로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런 능력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객관적 견해를 갖는 것에 항상 실패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도 정신 이상이고 잠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적 방향에 의해서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증상은 신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대인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민족 민족 간에도 이것은 나타난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성적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성과 더불어 정서적인 태도로써의 겸손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 때, 자아 도치적 자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겸손하고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사랑은 겸손은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 생애를 통해 이 능력들을 개발해야 한다.

내가 이방인에게 객관적일 수 없을 때는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객관적일 수 없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객관성을 읽고 있을 때의 상태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성과 객관성을 얻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기술을 절반정도 습득한 것이다.

사랑의 능력은 자아도취와 어머니로부터의 근친상간 사랑을 벗어나는 것이다.

나와 현실 사이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을 알기 위해서는 신앙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 신앙의 구분
    • 비합리적 신앙
    • 합리적 신앙

비합리적 신앙은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이다. 반면 합리적 신앙은 자신의 감정, 사고에 대한

경험의 뿌리 받고 있는 확신이다. 합리적 신앙은 견고성과 확실성을 말하며 특별한 믿음이라기보다

퍼스낼리티를 대표한다고 생각된다. 합리적 신앙은 생산적 지성과 저서적 활동에 근원이 있다.

합리적 신앙은 합리적 사고에 중요한 역할은 한다. 예를 들어 과학자가 어떠한 발견을 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신앙이 기본이다. 합리적 비전화를 통해 발견된 것들은 세밀한 분석을 통해 적합한 것을

찾아준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갈릴레오, 뉴턴 등 여러 사람들에게서 이성과 합리적 신앙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을 견지하다 화형 당하기도 파문당하기도 했다. 합리적 비전으로부터의 이론의 형성까지는 신앙이 필요하다.

이런 신앙은 자신의 사고력, 관찰력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비전은 권위적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사고와 판단은 합리적 신앙의 경험이다. 하지만 이뿐 아니라 사랑, 우정 등 인간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불변성을 말한다. 그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본적 동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보자면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환경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지속적인 자아, 우리의 핵심을 알고 있다. 이렇듯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성실해질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하며 인간 실존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의 가장 기초적인 상태는 어머니가 아이의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해 걷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동의 발달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한테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이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도록 도와준다. 반면 조작은 어린아이의 바람직한 행동 등을 억압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길 바랐다. 이것은 마치 사람을 로봇처럼 보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 대한 신앙은 인류에 대한 신앙에서 절정을 이룬다. 인본주의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인본주의는 이러한 신앙이 바탕을 두게 되면 사랑, 우정, 평등, 정의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수립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고와 관찰을 통해서 이러한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합리적 신앙은 '생산성'을 말한다. 생산적으로 산다는 것은 권력에 대한 신앙과 반대되는 말이다. 현존하는 힘을 믿는다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을 닫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현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권력에 대한 신앙에는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신앙만 있을 뿐 합리적 신앙은 없다.

권력은 역사를 통해 가장 불안정 것으로 입증되었다. 권력에 의존한다는 것은 용기 없음을 의미한다. 용기가 없다면

사랑을 받고 할 수 없다.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챕터에서 말하는 용기는 무솔리니가 말하는 허무한 용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과 용기에 대한 연습이 필요한가? 만약 당신이 신앙이 없다면 당신은 항상 근심과 걱정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신앙과 용기를 훈련하는 방법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 신앙과 용기를 훈련하는 방법
    1. 어디서 언제 신앙을 상실하는가?
    2. 신앙의 상실을 은폐하는데 이용되는 합리화 간파
    3. 어디서 우리가 비겁한 태도로 행동하는가?
    4.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하는가?

위의 4가지에 대한 인식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용기를 훈련할 수 있다.

우리가 신앙을 배반하면 신앙은 약해진다. 배반이 거듭될수록 약해지는 악순환을 겪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맡기고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상대방의 사랑을 일깨울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활동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여기서의 활동은 외부적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내면적 활동을 말한다.

우리는 내면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의식해야 하고 각성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사랑을 하면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내면적 게으름을 피하게 되고 하루 종일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여 사랑을 실천한다. 사랑의 영역에서는 생산성과 비생산성의 영역을 나눌 수 없다. 사랑의 기술에 대한 논의는 개인적 차원에 끝나지 않는다. 영역을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영역과도 연관이 있다. 이와 같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나눌 수 없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통찰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극적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에서 받은 만큼 사랑한다는 공정성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공정성의 원칙은 자본주의로부터 왔다.

우리는 남이 해준만큼 다를 바 없이 남에게도 해주어라는 중용의 격언을 알고 있다. 그런데 중용의 격언과 공정성의 원칙을 혼동하여 사용한다. 중용의 격언은 이웃과 하나 되고 사랑하는 뜻이다. 반면 공정성의 원칙은 중용이 말하는 책임과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공정성과 사랑의 차이를 인식하여야 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 분위기라면 과연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은 세속적인 관심을 끊고 가난한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슈바이처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사회를 살펴보면 세속적인 관심과 사랑이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사랑을 미친 순교자 같은 사람들이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급진주의자들이다.

급진주의는 도덕적 허무만을 가져온다. 사랑과 세속적인 관심은 추상적인 의미에서만 양립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를 살펴보면 복잡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딱 그렇다고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본주의에서 사랑이 피어나길 기원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소비와 생산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추구한다. 사랑은 겉으로 돌뿐이다.

우리는 소비와 생산을 하는 자동인형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최고를 추구하게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단연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의 욕구가 있다. 단지 그 욕구가 은폐되었을 뿐이다. 욕구 은폐되었다는 것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결여상태에 대해 살펴보고 결여상태를 만든 사회적 조건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사랑보다 사회적 차원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