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어서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2장 사랑의 이론 3부에 대해서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3부 2편 사랑의 대상
- 성애
- 자기애
- 신에 대한 사랑
대상자에 따른 설명
성애
성애는 모성애와 형제와 달리 한 사람과의 완전한 융합을 바라는 사랑이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갑작스럽게 다른 사람을 친밀하게 여기게 되고
그 사람과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물론 갑작스럽게 친밀감을 느끼는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친밀감을 가장 느끼는 순간은 성적 교섭이다.
상대방과의 분리를 신체적 분리로 가장 먼저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자신의 생활, 희망과 불안, 어린아이 같은 면 등으로
완전한 결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친밀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친밀감 또한 시간이 지나면 차츰 희미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랑을 원하게 되는데 성적욕망이 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성적욕망이 사랑이라는 관념과 필히 연결된다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체적인 면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그렇지만 사랑은 성적 결합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소망 안에는 탐욕이나 정복심이 아닌 부드러움이 있다.
육체적 결합의 욕망에 사랑이 없고 형제애가 없다면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 욕망은 일시적인 합일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서로 미워하기까지 한다.
부드러움은 프로이트의 이론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신체적 형태의 사랑에도 존재한다.
성애는 독점욕이 있다. 특정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면에서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둘만의 사랑으로 끝나는 성애는 환상에 불과하다.
성애를 사랑으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사랑은 의지의 행위이다. 이는 결혼이 가족들에 의해 선택되어지거나 결혼을 파기할 수 없다는
전통적 결혼관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사랑은 감정적이고 자발적인 것이라고
사람들은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하나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애의 중요한 요인은 의지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성애한다는 것은 판단이자 약속이다.
성애는 형제애처럼 모두를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한사람만을 사랑하는 개별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성애는 특수한 개인간의 사랑이기도 하면서 의지의 행위라는 것이다.
자기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덕으로 여기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신념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과거 서양 장칼뱅과 프로이트 또한 자기애에 대해서 죄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자아도취라고 했으며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사랑은 리비의 표현이며 이 리비도가 자신에게 향하거나 남에게 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많다면 남에게 향하는 리비도가 적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도취에 취한 사람은 극단적일 경우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자기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기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비이기적인 것이 덕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심이 곧 자기애라는 점은 검토가 필요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서 사랑한다면
인간인 나도 나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자기애는 미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다. 그리고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랑 받는 자에 대한 성장과 행복을 바라며 이 갈망은 사랑의 능력에 따라 다르다.
어떠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이득 외에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그런 성질때문에 이기심과 자기애를 같게 보는 오류를 범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기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엄청 사랑하는 듯 보여도
실상은 자기 자신을 엄청 미워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관심이 지나친 어머니를 예로 들고 있다.
관심이 지나친 어머니는 아이를 엄청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아이에게 집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여된 마음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심은 '비이기주의'로부터 발생했다. 비이기주의적인 자신을 표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결여를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말이기도 하다.
비이기적인 모습은 이기적인 모습보다 주변에 더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비이기주의적이고 생산성의 결여를 가진 이기심은 자기애와 다르다.
진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과 남을 동등하게 생각하며
남도 사랑하고 자기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에 대한 사랑
인간은 분리된 상태를 합일 상태로 변화시키려는 욕구가 있다.
이는 종교적인 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의 성격구조를 분석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살아왔지만 자연과 합일을 이루려고 집착한다.
그래서 원시종교에서는 동물들의 가면을 쓰고 숭배했으며 조금 더 인간사가 발전했을 때는
점토, 금, 은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했다. 그리고 더 발전했을 때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을 숭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숭배하는 신이 남성성을 가지는지 여성성을 가지는지에 관련되며
인간이 도달한 성숙도와 신의 본성과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본성을 결정하는 정도와 관련된다.
📍 신의 본성은 남성적, 여성적
인간이 숭배하는 신은 종교의 모계적 시기에 따라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어머니를 여신으로
보거나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중요시했다.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평등했다.
인간의 사회는 그 이후 부계적 종교관으로 발전한다. 부계적 종교관은 모계적 종교관과 달리
경쟁과 투쟁이 주를 이루었다.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어야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머니의 사랑을 소망하였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신비주의로서 어머니의 사랑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틴 루터는 인간은 어떤 일을 해도 신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가톨릭교리는 이런 태도로 인해서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부계적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모계적 종교관도 숨겨져 있다. 그래도 부계적 성격이 강한 것이 루터 신앙의 특징이다.
부계적 양상은 신이 엄격한 분이시며 나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모계적 양상은 내가 죄를
지어도 신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 인간의 성숙도에 따른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본성
부계적, 모계적 양상은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위에 말했듯이 신에 대한 인간의 본성을 알아보기 위한 요소인 인간의 성숙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자면 부계적 성격의 종교관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신은 인간이 열매를 먹었다는 이유로 추방하였고 그가 사랑하던 노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이는 등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말하는 부분도
이러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신은 인간을 멸망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 계약으로 인해서 신은 속박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한다. 변화가 따르면서
신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정의이자 진리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신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또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신을 이렇다고 저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인류는 발달한다. 일신론 사상이 성숙해져 가면서 신에 대해 말하지 마라는 것은
원칙으로 자리 잡는다.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신은 진리이자 사랑이며 정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인간적이라면 신은 나일 수밖에 없다.
신이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순수한 일신론적인 사고로 변화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종교에서는 아버지가 나에게 벌을 주는 존재이며 모든 것을 해결하는 존재로
여긴다. 몇몇 성인들은 이를 극복했으나 다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신이다.
참으로 종교를 믿고 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신에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것이며
신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겸손할 것이다.
유신론적 관점에서는 신에 대한 지식을 부정한다. 하지만 비유신론적 관점에서는 인간을 초월하는
신은 없다. 그러나 이 둘의 견해를 가지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런 신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서 동서양의 종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동양과 서양 종교의 차이는 논리적인 개념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서양 종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논리를 기반으로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동시에 동일한 것에 동시에 동일한 관련에서 종속하고 동시에 종속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역설적 논리학은 동일한 것과 동일하지 않은 것을 서로 상호배제적으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 및 인도의 사상과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이었고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서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들어가지만 같은 강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이지만
우리가 아니다"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노자의 철학에서는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인도와 노자의 철학을 살펴보면 신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하며 언어나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라문의 철학은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보려고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또한 매우 모순적인 철학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다 사상을 살펴보면 신은 무지의 궁극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낸 신의 무명이라는 것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절대무도 비슷한 표현이다.
마이스터 에그하르트는 신성한 일자는 부정의 부정이고 거부의 거부라는 표현을 했다.
사고한다는 것으로 신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에 대한 경험으로 우리는
신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생활방식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이러한 면은 스피노자와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관용'이라는 것으로 올바른 생활방식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점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개조를 강조하는 명상행위 등 올바른 행동을 점차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올바른 행위보다는 올바른 사고를 더 중요시 여겼고 그에 따라 비신자와 이교도들에게
비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이런 사고로 인해서 원자핵과 과학이 발달하게 된다.
서양은 올바른 사고를 중요시 여겼고 동양은 올바른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이스터 에그하르트는 신과 우리가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동서양의 종교를 살펴보면 우리는 어버이의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이
동일선상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의지하면서 자라게 된다.
그로 인해 어머니에게는 무력한 애착을 배우고 아버지에게서는 남신에 대한 순종적인 애착을 배운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성숙한 인간이 되어간다.
이렇듯 인간은 사랑과 정의 원리를 흡수하여 신과 일체 되는 경험을 배우고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사랑과 어버이의 사랑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어버이의 사랑을 받고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을 때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런 면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사회구조에 따라서 우리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
유치한 사회구조에 있었다면 우리는 유치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성숙한 개념의 씨앗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일신론적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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