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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사랑의 기술 3장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by 신수토기종삼 2024. 10. 6.

안녕하세요.
오늘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3장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를 읽고 포스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서양 사회 사람들이 생각한 사랑

사랑은 성숙하고 생산적인 사람들의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랑 능력은 문화권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 사회 문화 구조는 형제애, 모성애, 성애 등의 사랑보다는 사랑의 붕괴를 가져오는
사이비 사랑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사회적 관계가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용한 인력이나 기술 노동력은 시장의 조건에서 자유의 공정하게 거래 된다.
시장에서는 수요가 없으면 가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요가 없는 노동력은 교환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그에게 유익한 투자가 되는 노동력을 사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본가의 조건에 맞춰 노동력을 팔아야 된다.
그로 인해 경제적 구조로 인한 위계질서가 생기게 된다.
살아있는 인간의 힘보다 수요가 많은 물품들이 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달에 가면서 대기업은 계속해서 커지고 작은 기업은 중앙에서 밀려 나는
중앙 집권적이고 집중화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으로 자본의 소유권은 자본을 관리하는 기능과 상관없는 구조로 가고 있다.
많은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한다. 하지만 관리층은 기업을 소유하지 못하고 관리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층은 최대 이익을 거두는 것 외에 기업 확장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노동자들 또한 강력한 관료적 기구의 기대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노동 분야가 개인적인 분야에서 조직적인 분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별의 사람들은 독립적인 성질을 가지게 되었고 관리자들에게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기계 톱니바퀴 같이 소모적인 성격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노동문화가 집중화된 기업에서 조직화되면서
근대 자본주의에서 인간에 대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근대 자본주의 집단에 협력하는 사람들은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구해 받지 않고
독립된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명령에 기꺼이 따르며 마찰 없이 순응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현대인은 자신의 동료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게 된다.
각자의 행동과 사상의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된다.
조직과 함께 있다 보니 고독을 느끼며 분리 상태를 극복하지 못해 깊은 불확실성과 죄책감 불안해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제도적으로 엄격하게 규격화된 작업을 제공함으로써 이 고독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노동의 규격화뿐 아니라 오락의 규격화로 인해 사람들은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할 때 오는 만족감으로 절망을 극복하려고 한다.
현대인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 만족하지만 동료들과 접촉도 없고 자아도 없는 불안한 상태로 살아간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상품 거리를 사고 만족스러운 소비를 하며 즐기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이런 상황은 물질적으로도 일어나지만 정신적으로도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사랑도 교환 과소비의 대상이 된다. 현대사회 사람들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
특히 이것은 결혼에 대한 논문 주제에서 제대로 나타나는데  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고용인인가 다를 게 없는 개념으로 결혼을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은 핵심적인 관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두 사람이 노력하는 관계로 흘러가게 된다.
사랑과 결혼이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개념으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사랑의 실패를 성적 적응을 이룩하지 못한 점에서 찾았다.
성행위에 대한 무지와 잘못된 성적 기교 때문에 결혼과 사랑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실패를 바로 잡기 위해 부부들에게 올바른 성행위를
암암리에 알려주며 서로 만족시켜주게 되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해결책에 정반대로 대부분을 강조한 것이었다.
성적 행복은 사랑의 결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에 대한 지식에 결핍이 아니라
억압에 있음을 정신 분석적 자료에서 찾아낼 수 있다.
사람이 공포나 증오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갖고 있더라도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본질임에도 프로이트 이론 때문에 이 본질적인 사실이 가려지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사랑은 성적인 현상으로 여겨진다.
생식적인 사랑을 통해 최대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생식적 에로티스트 점을
자기 삶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고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비정상적이며 맹목성을 따르고 강박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사랑의 대상으로부터의 감정 전이라고 표현했다.
성숙한 완성의 사랑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다는 존재를 두고 있었던 프로이트는
이런 형태의 사랑을 탐구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프로젝트사항은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유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관습에 반발로 인한 것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자본주의 구조를 바탕에 둔 인간 개념이 널리 퍼짐으로써 인기를 얻게 된다.
그래서 과대평가가 된 부분이 많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모든 여자를 정복하려는 욕망의 쫓기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압력을 취해 이 욕망을 저지해야 된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사상은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서 사랑, 증오, 야심 등 이성적 본능에 결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근본적인 현실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인간의 상황과
사회의 특수한 구조의 의해 결정되는 생활상의 실천의 있다는 것을 몰랐다.
프로이트는 본능적 욕구에 의해 행동하고 억압되지 않은 만족이 정신적 건강과 행복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주변에 무한한 성적 만족의 취해서 사는 사람들이 건강과 행복을 얻었다고 볼 수 없다.
아까 설명했듯이 프로이트 사상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팽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낭비를 강조하거나 경제적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자기 억제를 하지 않고 확대하는 시장을 바탕을 두고 있다. 개인의 만족을 위한 소비로 모든 것이 변했다. 이것이 성적 분야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다 프로이트 개념과 비교되는 개념이 등장하게 등장 하게 된다. 그 이론이 바로 설리반의 이론이다.
설리반은 성욕과 사랑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설리반의 개념에서 친밀감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상황으로
개인적 가치의 모든 요소를 확인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에리히 프롬은 규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규제란 간단히 말하면 상대방과 동일해지며 안전성의 효과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의 욕구에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는 걸 말한다.
설리번의 기술은 20세기 소외된 시장형 퍼스널리티의 체험을 기술하고 있다.
공통되고 적대적이며 소외된 세계에 함께 대항하는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에 대한 기술이다.
이것은 사실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 목표를 위해
상대방의 표명한 욕구를 모든 사람이 적응하는 것으로 봐도 타당하다.
 

현대 서양 사회 사랑의 붕괴 형태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의 형태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 상호 성적인 만족인 사랑
  •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인 사랑

 
이 2가지 형태는 신경질적 사랑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신경질적 사랑의 기본적인 조건은 애인 중 한 명이나 두 명이 모두 어버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버이에 대한 상을 애인에게 소망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제부터 서양 사회에서 나타는 구체적인 신경질적 사랑의 형태에 대해 알아보자.
 

  •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들의 사랑

이경우 남자는 애인에게 어머니의 보호 사랑 배려 칭찬을 바라지만 이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할 경우가 많다.
유아적 애착이 있는 남자들은 여자들의 관계에서 패면적이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의 목적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
올바른 여자를 만난다면 자신의 애정과 매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 여자가 그들의 환상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들은 갈등과 분노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애인에게서 어머니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없다면 사랑이 없다고 간주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남자들은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어하고 어머니의 사랑이 없으면 다른 여성들과 사랑할 수도 없다.
자유롭거나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아버지에게 애착을 느껴 나타나는 신경질적 사랑

아버지가 아들에게 관심을 쏟는 경우 좋은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권위적인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들의 행동에 만족한다면 그들은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들의 행동에 만족하지 않다면
그들은 아들을 꾸짖는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노예적인 방식으로 집착한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목표이고 그것을 성공할 때 안정감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만 여자관계에서는 표현하고 멀리 떨어져 져 있다.
여자가 그들에게 핵심적 중요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자에 대해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성적 성격으로 여자를 감동시키지만
그 이후 아버지상을 여자에게 바라기 때문에 그들은 실망한다.
왜냐하면 아내는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어버이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표현을 억제하는 환경 속 신경질적 사랑

어버이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표현을 억제하는 환경에서 나타나는 신경질적 사랑의 장애는 더욱 복잡하다.
이 경우 성인이 된 여자는 남성에게 피학대 음란증적 경향을 갖게 된다.
남성이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 소리치고 야단치는 경우 긴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무식적으로 이런 행동을 유발한다.
 

  • 사랑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우상숭배적 사랑

가끔 위대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사이비 사랑 형태인 우상숭배적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랑을 우상화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녀는 그의 기대에 따라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에 또 다른 우상을 찾는 등 악순환이 끝나지 않는다.
우상숭배적 사랑의 특징은 갑작스럽고도 강렬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위대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극단적인 경우 정신병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이비 사랑의 다른 형태는 감상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은 환상 속에 있는 것이며 지금 여기서는 경험할 수 없다고 바라보는 사랑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주로 영화나 잡지 사랑 노래에서 이러한 것들을 경험한다.
사랑의 경험을 스크린이나 노래에서 찾기 때문에 그들이 현실적인 관계에서 사랑을 경험할 때 그들은 긴장하게 된다.
이 감상적 사랑은 현재에 살기보다 미래나 과거에 사는 경우가 많다.
미래에 내 이상형을 만나는 상상을 하는 등 가공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고독과 분리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 투사적 메커니즘을 통해 나타나는 신경질적 사랑

신경질적 사랑에는 투사적 매커니즘을 이용한 사랑의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문제는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개조하는 등 종교와 흡사한 행동을 보이는 사랑이다.
투사를 통해서 남을 변화시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도 투사되는 경우가 있는데 흔히 하는 자식에 대한 소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문제를 남이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를 내면에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식들로 하여금 해답을 얻을 수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헤어져야 하는 건지 헤어지지 않고
가정에 화목을 자식들에게 주어야 되는 건지 고민한다.
하지만 화목한 가정 안에 감도는 긴장과 불행의 분위기는 결별보다 자식들에게 더 악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고 있으면 사랑이 갈등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환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갈등은 어느 당사자에게도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환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진짜 갈등은 회피하려는 것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는 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갈등을 통해 명료해지고 카타르시스 작용으로 힘과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다 자신의 핵심을 경험할 수 있다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핵심적인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핵심적인 경험을 통해 사랑을 인식하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각자 합일 되는 것이야말로 진짜 힘이고 사랑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도 사랑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이 붕괴와 신에 대한 붕괴는 거의 비슷한 수준의 이르렀다.
종교 부흥의 현장만 봐도 그런 사실이 명백해진다.
우상숭배적으로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 우리가 퇴행했다는 걸 알 수 있게 되고 불안하고 원칙 신념이 없어 보인다.
어린아이 같은 상태의 사랑을 할 뿐 어른이어도 어버이의 사랑을 원하는 거 같다.
사실상 중세 종교적 문화에서는 신을 도움 주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과 비슷한 행동과 말을 원칙 삼아 살았다.
진지하게 신의 대해 고민하고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런 노력이 전혀 없다. 사라지고 있다.
시장에서 성공하려는 갈망을 신에게 표현하는 방식만 존재할 뿐이다.
종교 문화적으로 신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원칙을
자기 생활에 적용하려는 8살 된 아이라면 현대인들은 세 살 어린 아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필요할 때만 찾고 그러지 않을 때는 전적으로 자기만족만 느끼고 있는 어린아이들일뿐이다.
중세 종교보다 훨씬 먼 원시 시대 우상숭배를 하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퍼스널러 티 시장에서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고려하여 최고의 이익을 올리는 수단으로만 사용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 동료, 자유로운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살아간다.
오로지 공정의 원칙, 소비한다는 만족만 있을 뿐이다.
경쟁 체제에서 더 적합한 심리 수단으로 신의 대한 신앙을 여기고 있다.
1920 년대만 해도 우리의 퍼스널리티를 개선하기 위해 신을 갈구하지 않았다.
현대 베스트셀러만 봐도 신에 대한 신앙을 자신의 퍼스널리티의 능력 증진 수단으로만 공부할 뿐
정신과 일치는 주장하고 있지 않다.
신의 당신을 반려로 삼으라는 말은 퍼스널리티에 개선만 말할 뿐이다.
신은 멀리 떨어져 있고 신에 대한 사랑은 현대에서 사라지고 없다.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칠게요.

사랑의 기술 3장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사랑의 기술 3장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